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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동독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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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Volksaufstand[1] vom 17. Juni 1953 / Volksaufstand in der DDR
영어: Uprising of 1953 in East Germany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75-14676%2C_Leipzig%2C_Reichsgericht%2C_russischer_Panzer.jpg](http://obj-kr.the1.wiki/d/32/18/65a7c2c9182ffefb81797057a4927b792268fd06175fc00377fb1c7d699398cd.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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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53년 동독의 공산주의 정권에 대항하여 동베를린의 노동자들이 일으킨 대규모 소요 사태. 1953년 6월 16일부터 17일까지 이틀간 지속되었으며, 소련군이 개입한 끝에 강제로 진압되었고, 이후 동독에서는 발터 울브리히트가 이끄는 공산주의 체제가 안착된다.
2. 내용[편집]
2.1. 배경[편집]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이런 상황에서 동독의 윗선을 좌지우지하던 스탈린은 1953년 3월 급서한다. 스탈린의 뒤를 이어
2.2. 진행[편집]
6월 16일 동베를린의 건설 노동자들은 정부를 비판하며 파업을 결의한다. 파업의 소식은 삽시간에 동독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하루가 지나기 전에 동독 전역의 200개 이상의 도시에서 100만 명의 시민들이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다. 동베를린에서만 4만명 이상이 시위에 참가하였고, 급기야 시위대들은 일시적으로 동베를린을 넘어서서 서베를린에 도달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베를린 내에서는 왕래가 자유로웠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가 멀다하고 지식인들이 서베를린으로 망명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것은 1961년의 일. 다음날인 17일이 되면 시위는 한층 격화되어 단순한 파업을 넘어선 소요로 발전한다. 전날만 하더라도 노동 부담 완화라는 요구 조건에서 보여지듯 노동 쟁의의 요소가 강했으나, 이 날이 되면 발터 울브리히트를 비롯한 동독 지도부의 총사퇴를 시위대들이 요구했던 것. 위협을 느낀 동독 정부는 소련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미 6월 초에 동독 내에서 반소련 움직임이 눈에 띄게 증가하자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동독 주요 인사들을 불러서 일처리를 똑바로 하라고 조인트를 깠다고 한다(...) 이 시점에 이미 소련군이 개입할 것은 분명했던 대목. T-34 탱크를 앞세운 2만명의 소련군이 8천여명의 동독 경찰과 함께 진압을 시작했고, 계획된 무장 봉기가 아니라 파업에서 촉발된 즉흥적인 민주화 시위였던 만큼 사태는 신속하게 진압된다. 동독 정권에서 밝힌 공식적인 사망자 수는 125명. 서구 측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사망자 수를 높게 잡는다. 사태 진압 이후 동독 정권에게 체포되어 사형 당한 희생자들까지 합치면 500명은 넘는다는 것이 냉전 기간 내내 서독 정부의 추측.
2.3. 결과[편집]
가장 큰 도전을 극복한 동독 내에서는 발터 울브리히트가 이끄는 공산주의 체제가 안착된다. 또한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의 사례와 달리, 동독은 정권 자체는 공산주의를 굳건히 지지했기 때문에 이후 1989년 동구권 혁명에 이르기까지 소련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남게 된다. 하지만 수면 밑에서는 반정부 운동이 꾸준히 이어졌고, 이는 결국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로 이어진다.
한편 서독 내에서는 입으로만 반공주의를 내세우고 실제로 일이 터졌을 때는 방관한다면서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왔었다. 그렇지만 소련 당국의 무자비한 진압 탓에 다른 한편으로는 서독 내에서 반공주의 성향이 강화되면서 콘라트 아데나워가 이끄는 기민당 집권 체제가 강화되는 결과를 일으키기도 했다.
3. 여담[편집]
- 서독은 국가 차원에서 희생자들을 기리면서 1990년 통일 이전까지 봉기가 일어난 6월 17일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했었다.
- 여담이지만 이 당시 DFF의 악투엘 카메라가 관제성향의 논조를 지니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의외로 방송초기에는 동독정부에게 상당히 비판적인 논조를 취했지만 정권으로부터 통제를 받지 않았고 동베를린 시위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때문에 시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상세하게 보도되면서 문제가 되었다. 시위가 진압된 이후로 방송관계자들이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했던것은 당연했고, 방송 내용 자체가 정권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